동물은 어렸을 때부터 불가항력적으로 좋아했어요.
너무 일방적으로 좋아해서 동물들한텐 괴로울 만큼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닌 것 같아서 미안했죠.
동물을 좋아했지만, 역시 돌봄의 주체는 엄마였기에, 한동안 동물을 키울 순 없었어요. 그러던 날 대학생 시절, 2017년 10월 5일, 추석연휴라 본가에 내려왔을 때ㅡ 꿈 속에서 고대하던 순간처럼 갑자기 제게 왔어요. 마치 선물처럼..
아빠가 차 바퀴 밑에서 울고 있어서 데려왔다고 배 밑에 올려놨어요. 그렇게 눈 뜨자마자 마주했고요.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생각해도 실현되지 못했기에 갑작스레 맞이한 행운같이 느껴졌어요. 하룻동안 같이 놀다 보니까 아빠한테 다시 돌려놓으라는 엄마의 말은 말도 안되게 느껴졌고, 마침 추석연휴라 받은 용돈으로 동물병원에 데려갔어요.
검진과 용품 구입 및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내 손 만한 아기고양이와 함께 자취방으로 올라갔어요. 그때부터 고양이와 함께 살기 시작했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양이가 없던 시절의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무슨 낙으로 이렇게 긴긴 하루를 보냈을까? 새삼스레 궁금해질 정도로 고양이의 비중이 너무 커요. 하루의 비중에 고양이가 차지하는 비중도 크고요. 고양이가 삶의 원동력으로 작용해요. 힘들어도 내가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이유로서.
그 이상으로도 의미가 커요. 동물을 좋아하지만 마치 어린 소년이 소녀에게 가볍게 품는 좋아하다 정도와 같은 어렴풋한 감정이었지, 앞서 말했듯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을 알아가려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려는 시도는 못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정말 서툴렀지만, 던져진 채로 배워나가고, 더 이해하고, 더 노력하고, 더 사랑하게 됐고, 그 뿐만 아니라 ㅡ마치 에로스가 육체적인 아름다움에서 추동돼 정신적인 아름다움으로 상승해가고, 아름다움의 난바다로 흘러가, 더 이상 좀스러움의 연연하지 않고 이데아의 세계까지 상승해 불사의 경지가 되면서 신적인 존재가 되기까지의 '상승'의 과정처럼ㅡ
제 사랑은 상승해갔어요. 혐오동물이라고 천대받는 비둘기가 더 이상 천해보이지 않고, 농장동물들이 생명이 아닌 미뢰를 즐겁게 해주는 고깃덩어리로 느껴지지 않는 데까지요.
저는 더 이상 가죽 제품을 소비하지 않고, 고깃덩어리를 씹지 않으며, 나와 상관이 없는ㅡ 창고에 묶여 사는 진돗개(주인 할아버지가 보살펴달라고 하심..)를 정기적으로 보살피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4km를 이동해요.
정기적으로 동물 분야에 기부를 하고, 동물권 운동에 전면적으로 engagement 하기도 하죠. 이게 사랑의 상승이자, 힘 아닐까요? 제겐 너무나 크고, 고마운 존재라.. 덧없이 고맙게 느껴지네요. 사랑해! 너희들이 있어 세상이 고맙고, 애틋해.
동물들아!